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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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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따라온 병영성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은 본래 경주 동남방 20리 떨어진 토을마리라는 곳에 있었다. 절도사영을 옮길 적지를 조사하였으나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된 곳이 기박산성 자리였다. 기박산성은 만리성의 맨 동쪽 끝으로 동대산의 한 정점이 되는 곳이며 동쪽으로는 산의 경사가 완만하여 적들이 양남면의 수념 등지에서 산을 넘어오기 용이한 곳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 자리에 성터를 잡고 성을 쌓을 자리에는 그 둘레에 붉은 기를 꽂아 표시하는 한편 동, 서, 남, 북의 네 개 문을 내는 자리도 따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좌병사(左兵使)의 휘하에 있는 군졸은 물로 가까운 고을에 영을 내려 장정들을 동원하는 일대 역사가 시작되었다. 가까운 산천에서 돌을 모아 나르는가 하면 나른 돌을 다듬는 석공들의 망치소리가 온 산천에 요란하게 메아리치며 돌은 한단한단 쌓아 올려갔다. 이러한 때 별안간 동해쪽에서 일진의 광풍이 거세게 몰아 닥치어 성터를 휘몰아쳤다. 성을 쌓고 있던 장정들도 다 일손을 놓고 바람을 피하고 있었으나 성둘레를 표시하여 기들이 다 넘어지고 그 가운데 기 하나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천공에 높이 떠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성을 쌓고 있던 사람들이 날아가는 기를 바라보고 있으니 점점 하늘로 떠 올라 남쪽으로 갈뿐 떨어지지 않았다. 이 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축성도감도 이상하게 생각한 나머지 한 군졸을 시켜 말을 타고 그 기가 떠가는 곳을 뒤쫓게 하였다. 기를 쫓아 따라가던 군졸이 동천 가까이 오니 그 기는 별암산 위를 한바퀴 도는 듯 하더니 떨어지고 말았다. 뒤 따르던 군졸이 말을 달려 산위에 올라 기가 떨어진 곳을 보니 마치 소쿠리처럼 생긴 분지에 남쪽으로만 열려있는 지형이었다. 기가 떨어진 자리를 확인하고 돌아온 군졸은 이 일을 도감에게 소상히 보고하고 좌병사는 축성공사를 잠시 멈추게 하고는 막료들을 거느리고 기 떨어진 곳을 찾아 돌아다보니 과연 성터가 될만한 곳이었으며 또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일진의 광풍이 몰아쳐 기를 이곳으로 날려 보낸 것은 아마도 신(神)의 가르침으로 이 곳에 성터를 잡으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이렇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은 병사(兵使)가 경상감사에 경상감사는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성을 울산으로 옮겼으니 이 성터는 거마곡(巨磨谷)이라 하는 곳이며 때는 태종 17년(1417) 2월의 일이었다.

나가소

어느 옛날의 일이었다. 다전 마을의 낙안산의 끝에는 나씨의 일족이 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또 태화강 물도 지금과는 그 강심(江心)을 달리하여 범서면 백천에서 굴화 앞을 지나 삼호 마을의 남쪽으로 흘렀다 한다. 그런데 나씨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곳은 땅이 넓고 또한 기름진 땅이어서 대대로 마을은 남달리 풍요한 마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잘사는 마을일 뿐만 아니라 신라(新羅) 서울 경주(慶州)에서 동래(東萊)로 가는 길목이 되어 있기도 하여 과객들의 드나듦도 빈번하였다. 하루는 이미 해가 서산에 기울었는데 다리를 끌며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인 한분이 이 마을에 들어섰다. 삿갓을 깊숙이 쓰고 지팡이를 짚은 이 노인은 옷도 남루하여 한눈으로 보아서 걸인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노인은 마을에서 집이 가장 크고 부짓집 같은 한 집을 찾아 대문안으로 들어서며 주인을 찾는다. "이댁 주인 계시오?" 하고 불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길손은 다시 목을 가다듬고 "주인 계시오?"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이윽고 한 종이 나오며 "누구를 찾습지요?"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길가는 나그네인데 주인을 좀 뵙고자 하네."하니 조금 기다리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바깥 주인이 나왔다. "누구인데 해저물 무렵에 사람을 찾소?" "예. 이사람은 월성(月城)에서 동래(東萊)로 가는 길손이온데 그만 해가 저물었기에"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주인은 "해가 저물기에 어찌 하자는 거요?"하며 되묻는 말이 아주 언짢은 눈치였다. "갈길은 먼데 헛간에서라도 하룻밤을 머물러 갈까하오"하니 주인은 다시 "우리마을을 찾는 사람이 당신 한사람 뿐인줄 아오. 손님들 때문에 우리 마을은 이젠 진절머리가 나서 못살겠소. 제발 좀 손님 안오는데 살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 나가들의 소원이오."하고는 그만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거절을 당하자 노인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길을 나서 무거(無去)에 이르러 등불이 켜진 한 주막집을 찾아 밤을 쉬었다. 날이 밝자 이 노인은 다시 주막을 나서서 영축산[靈鷲山(영취산)]으로 올라가 북쪽을 이윽고 살피더니 한동안 별 말이 없었다. 노인의 눈아래는 어제밤에 거절을 당하던 나씨들의 마을이 한눈으로 보였다.

다 기와집으로 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서 부자 마을임을 직감할 수 있었는데 한참동안 이 마을을 바라보며 말이 없던 노인은 한참 뒤에야 무슨 주문(呪文)을 외우더니 손에 가졌던 지팡이로 구영동 앞에서 배리끝을 거쳐 마을쪽으로 크게 한선을 긋더니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 갑작스럽게 서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덮여 오더니 하루 종일 쉴사이 없이 큰 비가 쏟아졌다. 밤이 되어도 비는 멈추지 않더니 새벽에야 겨우 멈추었다.

그러나 이 일대에는 많은 비로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곳곳에 산이 무너지고 강의 물줄기도 놀라게 변해서 태화강도 배리끝으로부터 나씨들의 마을을 지나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하였고 나씨들이 살던 마을은 흔적이 없어지고 그 주위는 큰 못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이 있는 뒤에 나씨들의 영화는 끝이 났으며 어디론지 다 헤어지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그 도사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못이 된 마을터를 나가소라 하여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베리끝의 애화

옛날에 울산에서 언양까지의 지방도가 나기 전에는 구름이 마을이나 다전에서 구영동(九英洞)으로 오고 가는데는 낙안산(落上山) 끝에서 벼랑을 따라 베리끝을 지나가고 오고 하였다.

이 길은 태화강(太和江)에 산세가 급경사를 이루어 떨어지므로 높은 벼랑을 이루어 있는 험한 곳이다. 어느해 여름의 일이었다. 며칠동안을 두고 큰 비가 쏟아져서 태화강은 홍수로 뒤덮여 있었다. 며칠동안을 내리던 비도 멎고 날은 좋아졌으나 강물은 아직 여전하게 위험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에 젊은 신랑 신부가 시집가지 않은 누이 동생과 함께 베리끝을 지나고 있었다. 강물은 길에 까지 넘쳐 남창 남창하고 홍수는 사납게 구비치며 흐르니 길손들은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사나이의 뒤를 따라오던 두 시누이와 올케가 아차하는 순간 그만 발을 잘못 디뎌 강속으로 떨어졌다.

큰 비명에 놀란 신랑은 뒤를 돌아 보았으나 처와 누이 동생이 한꺼번에 성난 탁류에 휘말리고 떠내려 가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자기 앞에 떠내려 가는 옷자락을 잡아 겨우 건져보니 자기 아내였다. 이렇게 하는 순간 숨을 돌려 보았으나 자기 누이 동생은 강 한가운데로 떠내려가면서 한번 얼굴을 솟구치더니 그만 탁류속에 돌아 오지 못하는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 애처로운 일이 있은 뒤의 일이었다. 누가 지어 불렀는지 모르는 일이나 한 슬픈 노래가 불리어 졌다.

남창남창 베리긑에 / 무정하다 우로라바 / 나도죽어 후생가면 / 남군님부터 정할래라

숯못과 동방삭

새일내의 성안초등학교에서 북으로 조그마한 산등을 한고개 넘어가면 숯못이 있다. 이 숯못은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반티이못(함지못)이라 할 정도로 작은 못이었으나 지금은 시의 지원을 받아 확장을 하였으므로 못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못이었으나 여기에는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東方朔)과 마고(麻姑)할미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아득한 옛날에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에는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선(女仙)이 살고 있었다. 그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명약을 가지고 있었던 신선이었다.

그 선약은 곤륜산에 자라고 있는 불사수(不死樹)라는 나무 열매로 빚어서 만든 것이며 그 열매는 몇천년만에 한 번 밖에는 영글지 않는 희귀한 것이었다.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곤륜산 기슭에는 약수(弱水)라 하는 강물이 둘러 있으며 이 강물은 끝없이 깊으면서도 새털 하나도 물위에 띄울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강을 건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 강물의 안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삐죽삐죽 창날 같이 솟아있고 이들 산들이 모두 새빨간 불을 내어 뿜고 있었다.

이렇게 험한 곳으로 이름이 난 것이 곤륜산이었으나 동방삭이 여기에 숨어 들어갔다. 마침내 해발 1만 1천리가 넘는 곤륜산의 정상으로 들어가니 다섯 아름드리나 되는 큰 벼폭이 우거져 있었고 그 앞에는 개명수(開明水)가 지키고 있으며 서왕모는 요지에서 가끔 목욕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들어간 동방삭은 불로 불사약을 찾았으나 이를 얻지 못하자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먹고 돌아오고 말았다. 이로부터 동방삭의 장수생활이 전개된다.

그는 전한의 무제 때에 조정에서 벼슬하여 상시랑, 태중대부에 까지 오르면서 해학(諧謔)과 능한 변설(辨說)로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궁중에서는 윤활유격인 역할을 하여 그 말 한마디로 긴장에 쌓인 분위기를 봄날처럼 부드럽게 하였다. 그런데 그도 서왕모의 대노를 사게되어 도피행각이 계속된다.

서왕모의 명을 받은 마고 할미는 동방삭을 잡으려고 찾아다녔으나 변신술에 능한 그를 잡을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마고 할미는 숯못에서 기다리기로 하여 세월이 간지 얼마였는지도 몰랐다. 숯못에 앉아 검은 숯을 바래면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긴 손톱도 다 닳아 모지라지고 말았다.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하루는 숯을 바래고 있을 때였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보니 이상하였다. "노파는 왜 숯을 그렇게 씻고 있오?"하고 물으니 노파가 답하기를 "검은 숯이 흰숯이 되도록 물에 씻어 바래는 중이라오"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길손은 무심코 "헤헤, 난 삼천갑자를 살아도 검은 숯을 희도록 바래는 일은 첨은 보는 일일세, 에헴"하여 버렸다. 이 말은 들은 마고할미는 "너를 잡으로고 기다린지 오래네, 이제 네 명도 끝장이구나"하며 동방삭을 잡아가버렸다. 이 숯못에서 한마디의 실언으로 1만 8천년의 운명이 끝날 줄은 그는 미처 몰랐다.

어사암과 원고개

때는 이조 말기였다. 다운동 다전(茶田) 마을에는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의 5세손 서달급(徐達伋)이 다산사를 정조 때 세워 망조당을 받들고 있었다.

어느날 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가 이 다산사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부하로부터 급한 기별이 왔다. 구름마을[雲谷(운곡)]을 지나가는 한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풍채나 거동이 아무리 보아도 보통 선비와는 다른 수상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도호부사의 머리는 번개처럼 스쳐가는 한 육감이 있었다.

급히 걸음을 재촉하여 지름길로 난곡(蘭谷) 마을로 빠져 나와 다시 발길을 돌려 구름 이쪽으로 나오니 큰 바위 위에서 어떤 나그네가 과연 발길을 멈추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도호부사는 그 길손 앞으로 나아가 정중히 인사하며 성내로 길을 안내하였다 한다. 뒤에 알게된 일이지마는 그 길손은 다름아닌 암행어사(暗行御史)였다 한다.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사람들은 길손이 쉬고 있던 바위를 가리켜 어사암(御使巖)이라 하였고 도호부사가 길을 질러 갔던 곳(지름길)을 원님이 질러간 고개라는 뜻에서 원고개라 하였다.

이 어사암은 높이 4m에 직경 3m되는 바위로 그 위에는 사람이 19명정도 앉을 수 있는 바위였으나 지금은 메워져 높지 않다.

왕생이들과 한림장터

영취산(靈鷲山)이 동쪽으로 그 줄기를 뻗으면서 여러 크고 작은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옥동에 이르러는 삼호산이 솟았고 그 동쪽으로 된곡말란이를 이루하여 신정동에 이르러서는 두리봉과 은월봉이 그 이름을 자랑하고 있다. 사람들은 옥동에서 신정동에 걸쳐 있는 이러한 산봉들을 일러 남산십이봉이라 하여 온다. 이는 크고 작은 열두나의 봉우리가 연접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울산사람들은 이 남산십이봉 아래에 큰 명당이 있다고들 회자(膾炙)하여 옴을 볼수 있다.

왕생(王生)이 들과 한림정(翰林亭)터, 은월터가 그것이다. 때는 이조의 중엽이었다. 국풍이라고 하는 한 풍수지리가가 울산에 왔다. 문수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두루 살피고 난 뒤에 발길을 동쪽으로 틀어 남산 십이봉을 타고 은월봉까지 오게 되었다.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추어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는 것이었다

이윽고 산을 내려오는 그는 무엇인가 찾은듯한 표정이었다. 달동에 까지 내려온 국풍은 다시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동의 옛이름 환지가 뜻하듯이 이 곳은 산세가 반도처럼 돌출한 고지를 형성한 곳이며 지금의 들은 아직 갈대가 우거진 간사지에 지나지 않았다. 국풍이 삼백보 가량 갈대를 헤치고 오더니 미리 준비하여 온 쇠말을 박고난 뒤에 중얼거리듯 왕생혈이라 하였다. 국풍은 다시 서쪽으로 되돌아 오더니 무덤실 근처에 다시 말을 박으며 그곳을 일러 한림정혈이라 하며 한림을 배출할 곳이라 하였다. 국풍은 다시 팔등촌에 이르러 원당못 쪽을 가리키면서 은월혈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국풍을 일러 사람들은 남사고라 하는가 하면 성지라 하기도 한다. 남산 십이봉하의 명당설은 큰 화제가 되어 상찬하여 내려 왔으나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구전하여 때로는 화제 거리가 도기도 한다. 왕생이 들에는 일정한 때 일인들이 경리부 건물을 지은 일이 있었다.

이 때 일하던 사람들이 쇠말을 찾아 내었다하여 한동안 심심찮게 화제에 올랐던 일이 있었으며 해방이 되고 나자 강남초등학교를 그 자리에 지었다가 옮겼다.

무덤실 근방에는 일정 때에 울산농업학교를 지으니 많은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과연 한림들이 날 자리였구나 하였다. 또 원당 근처에는 명당을 찾아 무수한 무덤들이 들어앉곤 하였다. 왕생이 들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두고 주시하여 볼만한 일이기도 하다.

윤부사의 명판결

이조 영조 때에 윤지태라는 울산도호부사가 있었다. 그는 부임하여 질병을 다스리며 군마전의 제도를 두어 소로써 짐을 실어 나르도록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보나 못을 고치고 막아 농사를 장려하여 객사와 장대도 중수하는 등 자못 그 치적이 볼 만 하였다.

어느때 민정을 살피기 위해 서부지방으로 순시에 나섰다. 사또의 행차가 태화 말랑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길가에 옹기짐 하나가 넘어져서 박살이 나 있었고 그 옆에는 한 늙은이가 주저 앉아 탄식을 하고 있었다.

그 사연은 이러하였다. 슬하에 아들이 없이 늙어 의지할 곳은 없고 장을 찾아 옹기를 져다 팔고는 근근히 연명을 할 수가 있었다. 이날도 구명점에서 옹기를 지고 울산장으로 오던 길이었는데 어깨를 파고드는 무거운 짐을 받쳐놓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별안간 회오리 바람이 불어 옹기짐이 넘어져서 그만 그릇들이 박살이 나고 만 것이었다. 사또의 눈에 비친 그 늙은이는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윤부사는 부하를 시켜 내일 동헌으로 나오게 하였다.

동헌에 돌아온 윤부사는 또 형방을 불러 동면에 사는 어부 가운데 넉넉하게 사는 사람 두 사람도 내일 같은 시간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옹기장수는 집에 돌아왔으나 깨어진 옹기의 아까운 것보다도 겁에 질려 밤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죄라고는 늙어서 자식없는 죄뿐인데 무슨 큰 벌이 내릴지 마음 둘바를 몰랐다. 날이 밝자 두 어부와 옹기장수는 윤부사 앞에 서게 되었다.

그 두사람의 대답은 한사람은 고기를 잡아 포구에 돌아오는 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기잡이로 나가는 시간이었다. 윤부사는 다시 물어 돛을 달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런데 두 어부의 답은 다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윤부사는 두 어부가 서로 한 어부는 동풍을 빌어 돌아왔으며 다른 한 어부는 서풍을 빌어 바람을 타고 바다로 나아간 것이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 죄없고 불쌍한 옹기장수가 그만 손해를 본것이라고 논고하였다. 그리하여 두 어부는 옹기값으로 각각 닷냥씩을 변상하여 주라고 판결한 것이었다.

그 후 이 말을 들은 고을사람들은 다 명판결이라 감탄하였다. 반탕골에는 윤부사의 선정비가 있다.

장군바우

성안동에는 남쪽 신선암(神仙巖)을 바라보고 의연하게 선 한바위가 있다. 사람들은 그 바위가 장군같다 하여 장군바우라 하며 이로 말미암아 마을이름 또한 장군바우라 한다. 어느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 한다. 남쪽의 신선암산에는 신선바우가 있어 아름다운 선녀 같았다.

장군바우가 신선바우를 늘 대하게 되니 그만 서로 정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서로간에 혼담이 이루어져 마침 내 신선바우가 있는 곳으로 장군바우는 장가를 들게 되었다. 장군바우는 농도 마련하는가 하면, 말도 마련하였고 신부를 태워 올 가마까지를 마련하여 놓았다. 장군바우가 장가를 드는 날이 다가와 분주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한 여인이 근처의 시냇물에서 빨래를 하다가 보니 무슨 떠들썩하는 기색이 있어 귀를 기울여 보니 다름아닌 장군바우가 신선바우에 장가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그 여인은 무심중에 "얄구저라 장군바우도 장가가는가배?"하였다. 이 여인의 한마디 말이 그만 여름철의 서리가 되어 바위는 굳어버렸다. 이때 장군바우는 그 여인을 끌어당겨 그만 깔고 앉아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장군바우 근처에는 가매바우, 농바우, 안장바우 등도 그대로 굳어버려 지금도 장군바우와 더불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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