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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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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수

김장수(1887. 5. 20 ~ 1952. 1. 3)

1919년 병영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 유학생으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그를 비롯한 병영 청년 회원들은 수차에 걸친 협의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병영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혈서로서 맹세하고, 4월 4일 오전 9시경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태극기, 독립선언서 등을 나누어 주고 11시 40분경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수백명의 시위대는 일경의 탄압으로 주동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김장수를 비롯한 청년회 간부들은 다음날 만세시위를 함께 재개하기로 결의하고, 4월 5일 다시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1천여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된 주동인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해 시위군중은 해산하고 그는 일경에 피체 되었다. 이일로 1919년 4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정필

이정필(1898. 2. 20 ~ 1968. 2. 8)

1919년 4월 4일 병영의 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가 중도에서 좌절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이문조, 이종근 등과 함께 김세진의 집에 피신, 밀회하여 이튿날의 재기를 계획하고, 문성초, 윤학이, 최현구 등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거사를 준비케 하였다. 4월 5일 이른 아침 문성초, 윤학이의 연락으로 다시 일신학교 부근에 모여 오후 3시에 『대한독립만세』 라 대서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큰 길과 성둑으로 행진하였으며 그 곳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본군경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엄준

엄 준(1885. ~ 1919. 4. 5)

1919년 병영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 곳 비밀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소식을 전해듣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청년회원들과 약속하였다.

그리고 자기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희사하여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거사준비를 하였다.

거사날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원들이 주축이 된 시위군중은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모여 병영 일대를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출동한 일본경찰의 무력행사로 여러사람이 검거되고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그를 비롯한 청년회원들은 다음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 1천여명에 달한 시위 군중이 행진하며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하였고,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본 군경이 무력을 행사하며 주동자 9명을 체포하자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하였다.

이에 일본군경이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선두에 있던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문조

이문조(1902. 6. 21 ~ 1971. 10. 16)

1919년 4월 4일, 5일 양일간의 병영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애국적 상무정신이 강했던 그는 일찍부터 항일의식을 길러오면서 비밀결사 병영청년회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청년회원들은 병영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거사일을 4월 4일로 정한 뒤 태극기 등을 만들며 거사준비를 하였다.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원들과 함께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모인 그는 학생들을 동원하고, 11월 40분경 태극기와 깃발을 앞세우며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이에 일경의 탄압에 가해져 주동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검거망을 피한 이문조 등 청년회 간부들은 다음날 만세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여 4월 5일 오후 3시경 1천여 군중이 가세한 가운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시위행렬을 선도하던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정달

황정달(1897.7.6. ~ 1971.3.24.)

1919년 병영지역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지역의 청년회원들이 병영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자 이 계획을 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태극기와 독립기, 독립선언서 등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로 간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영일대를 시위행진 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의 무력행사로 14명이 체포되고 시위군중이 해산하자 그를 비롯한 청년회원들은 다음날의 거사를 계획하였다.

4월 5일 다시 운집한 군중들이 시위를 벌이자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다수 발행하였고 시위대열은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어,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울산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 살인 등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응룡

김응룡(1901. ~ 1919. 4. 5)

울산사람으로 병영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병영 지역의 비밀청년회에 가입하고 있던 그는 4월 4일을 기하여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자기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희사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거사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회원들이 주축이 된 시위군중은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 동리, 남외리, 산전리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출동한 일본경찰의 무력행사로 여러사람이 검거되었다.

이에 그는 다른 동지와 함께 피신해 있다가 이튿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 다시 병영초등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행진하다가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군중이 1천여명에 이르자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군경을 증원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 등 9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자,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하였다.

이에 일본군경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선두에 있던 다른 3명의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선일

김선일(1880. ~ 1910.)

정용기 의진에 가담하여 울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과 광무황제 강제퇴위, 군대해산 등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처에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의병을 일으켜 무장투쟁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분투하였다.

평소 반일 의병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던 김선일은 영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고자 했던 정용기 의진에 가담하여 울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는 정용기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살인, 방화 등 적극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3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종용

이종용 (1899.2. 20 ~ 1986. 2. 11)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비밀청년회 간부인 이현우(李鉉禹) 등과 함께 혈서로 『결사보국』(決死報國)이라 서명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4월 4일 오후 9시경 일신학교(日新學校) 교정에서 학생들을 규합,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의해 시위가 중단되고 그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신원증명서(울산시장, 1982. 1. 27 발행) 울산. / 울주향토사(울산문화원, 1978) 218-220 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04-208 면

최금석

최금석(1897. 12. 12 ~ 1979. 1. 11)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청년회 간부 양석룡(楊錫龍) 등이 계획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참여하였다.

당일 오전 9시 병영리 일신학교(日新學校)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가로 행진하자, 만세소리를 듣고 수천 군중이 이에 가담하여 주재소로 돌진하다가 때마침 시위 주모자들을 체포하여 압송하는 수비대를 만나 주모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수비대를 포위하였으나 일군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대가 해산되고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수형인명표폐기목록 3.1운동실록(이용락) 630 면 울산. / 울주향토사(울산문화원, 1978. 2. 25) 221 면

이현우

이현우(1894. 10. 15 ~ 1959. 12. 27)

경남 울산(蔚山)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하상면 병영리(下廂面兵營里)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종욱(李種旭), 이종근(李種根), 이문조(李文祚), 박영하(朴永夏), 양석룡楊錫龍), 김장수(金長壽)등의 청년회 간부들 및 이종근과 박영하의 집에서 몇 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종욱, 박영하 등과 함께 이종근의 집에서 비밀모임을 가진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之)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아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그는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日新學校,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西理),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며, 결국 그는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이해 5월 2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 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9 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 권 205.207.208. 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 권 1214.1215 면

이종욱

이종욱(1896. 8. 9. ~ 1966. 12. 15)

경남 울산(蔚山)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하상면 병영리(下廂面 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현우(李鉉禹), 이종근(李鐘根), 이문조(李文祚), 박영하(朴永下), 양석룡(楊錫龍), 김장수(金長壽)등의 청년회 간부들 및 이종근과 박영하의 집에서 몇 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현우, 박영하 등과 함께 이종근의 집에서 만나 비밀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之)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아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3일, 이현우, 박영하 등과 함께 이종근의 집에서 만나 비밀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之)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아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그는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日新學校,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西理),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며, 결국 그는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었다가, 이해 5월 2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 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 권 205.207.208. 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 권 1214.1215 면

이종근

이종근(1897. 8. 20 ~ 1957. 6. 16 호 : 화암)

경남 울산(蔚山)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과 5일에 걸쳐 하상면 병영리(下廂面 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현우(李鉉禹), 이종근(李鐘根), 이문조(李文祚), 박영하(朴永下), 양석룡(楊錫龍), 김장수(金長壽)등의 청년회 간부들 및 이종근과 박영하의 집에서 몇 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현우, 박영하 등과 함께 이종근의 집에서 만나 비밀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之)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아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3일, 이현우, 박영하 등과 함께 이종근의 집에서 만나 비밀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之)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아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그는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日新學校,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西理),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나, 양석룡, 이종욱, 이종룡(李鐘龍)등 14명이 현장에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일단 해산 하였다.

주사문

주사문 (1890. ~ 1919. 4. 5)

경남 울산(蔚山)사람이다.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下廂面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그는 이곳의 비밀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 1919년 3월 서울에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4월 4일 오전 9시경, 문성초(文星超) 등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이 된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여러사람이 검거되고 해산하였다.

이에 다라 이문조(李文祚), 이종필(李鐘弼) 등의 동지와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이튿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시위행진하고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1천여명에 이르러서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등 9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자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감행하였으며, 선두에서 활약하던 그는 다른 3명의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이들의 나라위한 충정을 숭앙하여 1967년 4월에 병영, 서동 삼일사(三一祠)에 3·1 충혼비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07 면

문성초

문성초 (1887. 12. 30 ~ 1919. 4. 5)

경남 울산(蔚山)사람이다.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下廂面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그는 이곳의 비밀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 1919년 3월 서울에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4월 4일 오전 9시경, 문성초(文星超) 등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이 된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여러사람이 검거되고 해산하였다.

이에 다라 이문조(李文祚), 이종필(李鐘弼) 등의 동지와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이튿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시위행진하고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1천여명에 이르러서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등 9명이 13명의 군경을 증원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등 9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자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감행하였으며, 선두에서 활약하던 그는 다른 3명의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 : 한국독립운동사(문일사) 174 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 권206. 207. 208 면

최현배

최현배 (1894. 10. 19 ∼1970. 3. 23, 호 외솔)

『겨레를 사랑하며, 그 문화를 사랑하며, 그 말을 사랑한』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한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데 한평생을 바친 교육자이다. 외솔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면 일제 암흑기에 투옥과 고문, 교수직 퇴직이라는 험난한 가시밭을 헤치고 오직 민족의 혼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 분투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외솔선생은 울산군 하상면 동리 최병수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난 외솔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온 동네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자랐다. 1899. 2월부터 동네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2살 때는 동네서당을 대표하여 바둑대회에 나가기도 하였고, 1907.4월 14살에 그 면에 창립된 일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0. 4. 1, 17살에는 경기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최우수성적으로 입학하였으나 한일합방이 되는 바람에 周時經선생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1913. 2월(20세)까지 한글과 말본을 배웠다. 1915. 4. 12, 22살 되던 해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에 입학하여 1919. 3. 25에 졸업하였다. 1919. 3월 26세에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수신, 교육, 일어, 한문, 법제, 경제의 중등학교 교원 면허장을 받고, 관공립 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서 임용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향리에서 휴양하면서 조선인 상권확보를 위하여 지방유지들을 수합, 출자케 하여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다음해인 1920년에는 경남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1921. 12. 31까지 근무하였다. 1922. 4. 12, 29세때 일본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거쳐 1925. 4. 25, 32세에 교토 제국대학 대학원을 수업한 수 교육학 전공으로 1926. 3. 23, 33세에 졸업하였다. 이 때 졸업논문으로 쓴 『페스탈로찌의 교육학설』은 학교와 여러 단체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저술한 때도 이시기이다.

1926년 1월에는 일본 문부성으로부터 철학개론, 실림 및 논거의 고등학교 교원 면허장을 받았다.

1926. 4. 1, 33세 되는 해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전신)교수로 취임, 1938. 9. 25, 45세까지 12년간 전력을 쏟아 일했으며, 그사이 1926, 4, 1부터 1931. 3. 31, 38세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기도 하였으나 1938년 9월 왜정 경찰에 의하여 강제로 교수직을 사퇴당했다. 1939. 9. 26, 45세 되던 해, 실직 중에도 한글 연구의 완성에 힘써 <한글갈>을 지어 간행하였으며, 1941년 연희전문학교의 도서관 일을 맡아 복직되었으나 1942. 9. 49세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3년동안 왜정의 옥중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사형을 눈앞에 둔 1945년 해방이 되어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어학회 일을 하다가 문교부 편수국장을 있으면서 한극학회를 창립,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그후, 1954. 9. 10, 61세때 연희대학교 문교대학 학장, 1955. 4. 1, 62세때 연희대학교 부총장, 1957. 11. 15, 64세때 세종대왕기념 사업회 창립하여 이사 및 부회장 역임, 1962. 3. 1, 69세때 연세한글대학원 강의, 1964. 3. 1, 71세때 동아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및 교수로 취임등 외솔 선생은 해방된 조국의 얼·말·글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1970. 3. 23, 77세되던 해 새벽 3시 35분에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여 1970. 3. 26 사회장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립면 장현리에 안장되었다.

현재 외솔 선생과 관련된 대표적인 단체로는 그가 생전에 만든『한글 학회』와 그의 뜻을 기리는 후손들에 의해 설립된 『외솔회』가 있다. 이중 『외솔회 운산지회(회장 최종두)』는 외솔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외솔 선생의 뜻과 업적을 널리 펴는 원년으로 94년을 정하고, 울산지역 각계 단체들과 협조하기 위하여, 1993. 12월 창립하여 외솔선생 동상건립 마련, 서적 전시회 개최, 성신고등학교 ∼외솔 생가터∼동천강을 『외솔로』로 명명하기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한글 학회』는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로 『앉으나 서나 겨레 생각』이란 제목으로 외솔 선생의 업적과 생애, 저서를 묶은 책을 펴냈고 예총 울산지부에서는 1994. 10. 31 『울산출신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 탄생 1백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1990. 6월 울산 KBS방송국에서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상』을 제작하여 현 남구 옥동 도서관에 기증
  • 1993. 10월 문화체육부에서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
  • 1994. 10. 16 외솔의 달 기념 학술 발표회(문예진흥원 강당) 및 한민족 국제 학술회의 (성균관 대강당)
  • 1994. 10. 19 외솔 최현배 추모행사(경기도 양주군 장현리 묘소)
  • 1994. 10. 22 추모 학술세미나(한극학회 울산지회 및 예총 울산지부 주최)

또한 병영 국민학교에서는 『훌륭한 선배관』 전시실을 만들어 놓고 외솔 선생의 사진과 업적을 패널로 제작하여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교육에 활용하고 있는 등 선생의 고향 울산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홍준

이홍준 (1893. 4. 9 ~ 1969. 9. 27)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5 양일간 경남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청년들은 애국직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병영리에는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가 결성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이홍준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병영리의 만세운동은 서울 유학생 한명조(韓命祚)·이영호(李永浩) 등이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 때 병영청년회 간부 이현우(李鉉禹)·이문초(李文祚)·이종욱(李鐘旭)·박영하(朴永夏) 등은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치며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에는 독립선언서 2백에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종이와 명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아래 오른손 가운에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이홍준은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일신학교(兵營日新學校)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4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준비해 간 태극기와 깃발을 앞세우며 만세시위를 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내 각 동리를 진군하다가 일경의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이 대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청년회 간부들은 4월 4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에 만세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5일 오후 3시를 기해 이홍준 등은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면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 중 문성초(文星超) 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해산되었고, 이홍준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를 이 일로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신분장지문원지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최현표

최현표 (1902. 2. 7 ~ 1941. 3. 26)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5 양일간 경남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청년들은 애국적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병영리는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가 결성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최현표는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병영리의 만세운동은 서울 유학생 한명조·이영호 등이 3·1운동의 소식을 전해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 때 병영청년회 간부 이현우·이문조·이종욱·박영하 등은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치며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에는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종이와 면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아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최현표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국민학교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1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치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내 각 동리를 진군하다가 일경의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이 때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청년회 간부들은 4월 4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에 만세 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5일 오후 3시를 기해 권석운 등은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면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 중 문성초 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해산되었고 최현표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신분장지문원지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권석운

권석운 (1900. 8. 18 ~ 1943. 5. 9)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5일 양일간 경남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청년들은 애국적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병영리는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가 결성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최현표는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병영리의 만세운동은 서울 유학생 한명조·이영호 등이 3·1운동의 소식을 전해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 때 병영청년회 간부 이현우·이문조·이종욱·박영하 등은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치며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에는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종이와 면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아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최현표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국민학교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1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치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내 각 동리를 진군하다가 일경의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이 때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청년회 간부들은 4월 4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에 만세 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5일 오후 3시를 기해 권석운 등은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면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 중 문성초 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해산되었고 최현표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신분장지문원지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김재수

김재수 (1900. 6. 2 ~ 1949. 6. 29)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5 양일간 경남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청년들은 애국적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병영리는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가 결성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최현표는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병영리의 만세운동은 서울 유학생 한명조·이영호 등이 3·1운동의 소식을 전해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 때 병영청년회 간부 이현우·이문조·이종욱·박영하 등은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치며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에는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종이와 면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아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최현표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국민학교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1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치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내 각 동리를 진군하다가 일경의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이 때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청년회 간부들은 4월 4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에 만세 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5일 오후 3시를 기해 권석운 등은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면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 중 문성초 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해산되었고 최현표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174면 / 한국독립사(김영준) 하권 120면

서덕출

서덕출 (1906. ~ 1940. 신월)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 작년에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 옵니다

『봄편지』는 울산 사람 서덕출의 글로, 한국아동문학의 대표작으로 길이 기록될 작품이다.

어려서의 부상으로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누워 지내면서도 한결 같이 정갈한 심성으로 맑은 동심을 길어올린 이 동요작가 서덕출은 중구 복산동에서 부친 서형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되던 해 다쳐서 불구(곱추)가 된 탓에 정상적인 학교교육은 받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독학으로 깨우쳐 동요를 쓰게된다.

1923년 소파 방정환이 중심이 되어 개벽사에 발행한 『어린이』4권 4호(1925년5월호) 봄편지가 발표 되었을때 그의 나이는 19살이었다.

일제하에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발표와 동시에 주목을 받게되는 이 글은 나중에 윤극영이 곡을 붙여 더 널리 퍼지게 되었다.

빼앗긴 나라 잃어버린 나라로 비록 헐벗고 가난하여 앞날이 암담하였지만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 옵니다. 란 노래말은 불구의 몸으로 불운한 생활을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자유를 갈망한 자신의 모습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에 눌려지내던 우리 겨레의 가슴에도 '희망의 봄'을 새겨 주는 노래가 된 것이었다.

이 후 방정환, 윤석중 등 문우들과 교류하며 작품활동을 하던 그는 『눈꽃송이』 등 70여편의 동요를 남겼으며 『봄편지』는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신체적으로 닫힌 상황속에서도 자유와 희망의 열린세상을 노래하던 그는 아까운 35세의 나이에 타계했다.
(1940년. 중구 북정동)

1968년 10월 『봄편지』노래비가 울산 학성공원에 세워져 제막식을 가졌으며 매년 그 노래비 앞에서 울산시 관내 학생들이 참가하는 『서덕출 봄편지 노래비 건립기념』한글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고복수

고복수 (1911년 호적기재일은 1912.11.29. ~ 1972.2.10.)

고향을 알게 한 노래『타향살이』

도시가 공업화 되면서 지역 특성상 외지 사람들이 더 많은 울산은 그래서 '타향'이란 말의 체감도가 한결 더 높은 곳인지도 모른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 꼽아 헤어보니 /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타향살이』는 울산출신의 가수 고복수가 불러 유명해진 노래다.

일제하이던 1912년 울산군 하상면 서리, 현 중구 병영동에서 출생한 고복수는 지금의 병영 초등학교인 옛 일신보통학교에서 4학년까지를 다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학교를 마치고 성장을 하였다.

1932년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그는 이듬해 오케이 레코드사에서 취입한 『타향살이』와 『사막의 한』이 인기를 누려 단번에 레코드 가수로 성공한 첫 케이스의 유명 인기가수가 되었다.

'세 동무(1928)', '사막의 한(1929)', '타향살이(1933)', '짝사랑(1937)'등 그의 노래는 지금도 불리지만 고향과 나라를 잃고 타향을 전전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타향살이'는 그야말로 동포의 가슴을 적시며 두고두고 고향을 돌아보고 눈물짓게 하던 노래였다.

1934년 가을, 가수생활 25년을 마감하는 은퇴공연을 하기까지 후배가수 양성에도 힘써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학원인 '동화예술대학원'을 개설하여 이미자, 안정애 등의 인기가수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향연 61세로 1972년 2월10일, 멀고 먼 타향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노래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그를 기려 『고복수 가요제(1987년 울산예총)』가 개최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1991년 10월 17일 제4회 고복수 가요제 때 '타향살이'노래비가 건립되어 울산시 중구 북정동 동헌 앞에 자리하고 있다.

만족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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