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장도
작가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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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임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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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울산광역시 중구 신기12길70(태화동 희마아파트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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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명고정민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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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고 임원중(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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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수상경력
- 1946년공예품 최초 제작
- 1998년울산광역시 공예품 경진대회(장려상), 전국공예품 대전(특상)
- 2000년울산광역시 공예품 경진대회(특선)
- 2004년장도기능 보유자(울산광역시)
- 2007년울산광역시 공예품 경진대회(금상), 전국공예품대회(장려상)
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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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우리는 예로부터 몸에 칼을 지니는 풍습이 있었는데, 칼집이 있는 이 칼을 장도(粧刀)라고 불렀다. 한 뼘 정도 되는 이 칼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성년이 되면 고름에 달거나 허리춤에 차거나 주머니 속에 넣어서 잠시도 몸에서 떼지를 않았다고 한다. 장도는 기록으로 볼 때, 이미 선사시대부터 있어 왔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분의 차이에 따라 재료와 형태, 기법 등을 달리해 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백성들 모두가 장도를 패용한 사실이 문헌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예물 및 장신구로 정착되어 호화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장도는 더욱 일반화되고 장신구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특히 은장도는 부녀자가 절개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사용되기도 했던 정절의 표상으로서 독특한 정신사를 지니고 있어서, 시집가는 딸에게 마련해 주는 필수적인 혼수품이었다.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이 있어서 병영(兵營)으로 불리었던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 일대는 철의 생산지여서 병사용 무기(長劍) 등을 만드는 공방이 많기로 유명했으며 자연히 그 기술도 발달했다. 그 뒤 병마절도사영이 폐쇄하자 장인들이 담뱃대, 은장도 등을 만들었는데 일제시대에는 50여군 데의 공방이 성시를 이루었다.
은장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100%의 순은덩어리를 1000도의 불에 달궈 망치로 힘을 조절해 수천 번 두들기고 늘이기를 반복해서, 두께가 0.6mm 정도 되게 판을 만든 뒤 그 위에 칼자루 모형을 올려놓고 모형대로 본을 떠낸다. 이 은판에다 용이나 학, 사군자 등을 새긴다음 다시 고르게 다듬는다. 이렇게 다듬은 은판위에 동과 금의 합금으로 학과 파초를 붙여놓고 용접한 오동에 '天下一品 君子贄刀'(천하일품 군자지도)를 조각한 후 그 속에 은을 녹여 넣는다.
오동은 울산 은장도에만 전해지는 특별한 기법으로 칼을 칼집에 넣고 뺄 때 손이 닿는 부분이며 칼주인의 건강이 좋으면 까만 색이 유지되지만 그렇기 못할 경우 빨간빛이 돌아 건강 이상을 감지할 수도 있다고 한다. 칼날은 강철을 화로 속에 넣고 달구었다가 꺼내 두들기는 과정을 수십회 거쳐 완전히 담금질한 이후 줄과 사포를 이용해 모양을 내고 마지막으로 숫돌에 갈아낸 후 '一心刀'(일심도)란 글자를 조각함으로써 15∼18시간이 걸려 은장도 1개의 제작이 끝난다. 임원중(林元重)의 은장도는 기계 가공을 전혀 하지 않아 다소 투박하고 거칠기는 하지만 수작업의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은으로 만든 칼자루에 송진을 부어 칼을 물리는 등 전통 기법을 그대로 되살리고 있어 작품의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다.
작가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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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장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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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울산광역시 중구 병영11길8(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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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명고정민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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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
수상경력
- 1947공예품 최초 제작
- 1996경상남도 경진대회 특선
- 1997전국 공예품 대전 입선
- 2001울산광역시 공예품 경진대회 입선
- 2004울산광역시 공예품 경진대회 동상
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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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설명
울산지방은 어느 변방보다 왜적의 칩입이 잦은 곳으로 금속세공기술이 일찍이 발달하였다. 이런 금속세공기술을 바탕으로 생산된 은장도는 여자에게는 정조를 남자에게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 널리 사용되어 왔다. 특히 장추남선생은 전통적인 상감기법에 현대적인 실용성을 겸비한 작품을 많이 창작, 생산하고 있으며 제품의 실용성이 특히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