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갓집중구여행
  • 종갓집중구여행
  • 종갓집중구여행
  • 종갓집중구여행
  • 종갓집중구여행
  • 종갓집중구여행
  • 종갓집중구여행
중구가 아름답다

처용탈

작가이력

김현우 작가
  • 성명
    김현우
  • 주소
    울산광역시 중구 우정2길24(우정동)
  • 업체명
    처용탈방
  • 연락처

수상경력

  • 1995년 울산MBC 화랑학성개인전
  • 1996년 모드니미술관 김현우 탈전
  • 1997년 울산문화예술회관(제31회 처용문화재 기념전)
  • 1998년 부산 삼성금융문화센터 갤러리 초대전
  • 1999년 현대예술회관 갤러리 초대전(공동전)
  • 1999년 진주탈춤한마당 초대전
  • 2001년 울산시공예품경진대회(입선)
  • 2002년 울산시공예경진대회(입선)
  • 2004년 울산시공예경진대회(은상)

작품소개

작품소개 안내표 입니다.
이미지 작품설명 이미지 작품설명
처용탈
  • 품명 : 처용탈(산벚나무)
  • 크기 : 77 x 60cm
  • 가격 : 1,50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및 햇빛
처용탈
  • 품명 : 처용탈(오동나무)
  • 크기 : 77 x 60cm
  • 가격 : 1,50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및 햇빛
처용탈
  • 품명 : 처용탈(삼베)
  • 크기 : 60 x 50cm
  • 가격 : 70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및 습기
처용테라코타 초벌
  • 품명 : 처용테라코타 초벌
  • 크기 : 45 x 40cm
  • 가격 : 15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처용테라코타 재벌
  • 품명 : 처용테라코타 재벌
  • 크기 : 45 x 40cm
  • 가격 : 25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처용 목걸이
  • 품명 : 처용 목걸이
  • 크기 : 6 x 6cm
  • 가격 : 1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및 햇빛
처용시대1
  • 품명 : 처용시대1
  • 크기 : 35 x 40cm
  • 가격 : 35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및 햇빛
처용시대2
  • 품명 : 처용시대2
  • 크기 : 67 x 33cm
  • 가격 : 350,000 원
  • 주의사항: 충격 및 햇빛

약도

옛기록

처용에 관한 옛기록

처용에 관한 옛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유사 망해사조에 신라 49대 헌강왕의 개운포 행차에 관한 기록과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심전고, 동국통감, 연산군 실록 및 왕조실록과 악장가사, 매월당집, 악학궤범 등 수많은 기록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특히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기록인 악학궤범을 보면 처용의 얼굴 그림과 함께 처용무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처용의 복식 및 처용탈 제작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용해 보면, 「사모는 대(竹)로 망(網)을 떠서 만든다. 종이를 바르고 채색하고 꽃을 그린다. 가면은 피나무로 새겨서 만들거나(二 木刻造) 옷칠한 베로 껍데기를 만들고 채색하며 양쪽 귀에는 납구슬과 주석고리를 건다. 사모위에 꽃은 모란꽃과 복숭아 열매는 나무를 갈아서 만든다.」라는 기록이 나와 있으며 조선시대의 회화에도 보면 단원 김홍도의 민속화와 그밖에 작자 미상의 민화등도 여러점 있어서 조선시대의 처용무, 처용탈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을 기록으로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처용 설화

제49대 신라 헌강왕(879년) 시대에 서라벌 경주로부터 오나라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기에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아고가 노래가 끊이지 않고 풍우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에 임금이 '개운포'에 출유하였다가 장차 돌아 올새 낮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이었다. 괴상히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이 행하여 질것이라 하였다. 이에 당해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명이 이미 내리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라 이름 지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왕이 미녀로써 그의 아내를 삼게하여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하고 또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이 밖으로부터 집에 돌아와 자리에 두 사람이 누웠음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갔다.
노래에 가로되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라리 네히러라 둘은 내해었고 둘은 뉘해언고 본디 내해다만은 뺐겼으니 어찌 하리꼬"라 하였다. 그 때 역신이 나타나 앞에 꿇어 앉아 가로되,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과오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하지 아니하니 감격하여 아름다이 여기는 바다. 금후로는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악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 들였다. 왕이 서울에 환어하여 영취산(문수산) 동쪽에 승지를 택해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 또는 신방사라고 하였으니 용을 위하여 세운 것이었다.

처용탈

처용설화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 조선 9대 성종 임금때 씌여진 「악학궤범」 5권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이라는 기록에 궁중무인 처용무를 시연하는 방법과 노래 가사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악학궤범」 9권 "처용관복도설"편에는 처용의 얼굴 그림과 함께 처용무를 출 때 입는 처용무복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첫수까지 적혀 있으며 처용무를 출 때 필요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악장가사」에는 "청산별곡" "가시리" 등과 함께 처용가의 전문이 기록되어 있고 「교방가요」라는 책에도 처용무를 추는 모습 그림과 함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까지 사용되던 처용탈은 1930년대 순종 탄신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사용된 처용탈을 그대로 작업하여 사용하므로 「악학궤범」의 처용그림이나 봉배귀사도에 그려진 처용탈과는 어딘가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악학궤범」에는 처용탈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모위에 꽂는 꽃은 모란꽃을 달고 복숭아는 나무를 갈아서 만든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한가지 강조할 점은 일반적으로 다른탈에는 사모와 사모위의 장식이 발견되지 않는데, 유독 처용탈에는 복숭아 열매와 모란꽃을 다는데, 복숭아는 예부터 과일중의 최고의 과일이며 모란꽃 역시 꽃중의 꽃으로 알려저, 처용탈에 사용되는 모든 것은 최고의 것을 사용하며, 탈 역시 신라때의 것이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랜역사를 가진 탈이라 할수 있습니다.

처용무

처용무는 신라에서 비롯한 무희(舞 )로서 다섯사람의 처용가면을 쓰고 오방(五方)에 서서 추는 춤이다. 삼국유사에 처용은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이며 처용은 자기의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 앞에서 처용가를 지어 불러 귀신을 쫓는 기능을 지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처용무는 신라시대부터 연행(連行)되었다고 볼수 있다.
또한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는 처용무는 본디 한사람이 흑포(黑布)를 입고 흑사모(黑紗帽)에 적색면(赤色面)을 썼던 것이나 조선 세종때에는 다섯 사람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추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성종(成宗)때 나온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化臺處容舞合設)이라 하여 처용무가 나례(儺禮)에서 연행(連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처용무는 남무(男舞)로서 장엄하고 씩씩하며 신비스런 분위기의 춤이다.

방문자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