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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및 지명유래

    행정동인 태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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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세종 때 멀개(遠浦里)라 한 기록이 보이고, 정조 연간(1777~1800)에는 상말(上末)‧하말(下末)‧말정(末亭) 등 3개 마을로 갈려져 있었 다. 고종 31년(1894)에 이르러 말정‧태화(太和)‧화진(和津)‧반곡(盤谷)으로, 1911년에는 태화‧화진‧반곡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 때 이를 합하여 태화리(太和里)라 하였다. 이때 범서면에 속하였던 난곡(蘭谷)‧말정(末亭 : 세칭 ‘멍정’)을 부내면(府內面)에 흡수하여 태화리에 합하였다.
    1931년 11월 울산읍에 속했고, 1962년 6월 울산시가 승격되면서 태화동이 되었다가 1972년 동제 실시에 따라 태화동과 유곡동을 합하여 태화동이 되었다. 1985년 7월 15일 울산시가 남구와 중구로 구분될 때 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태화동은 행정상으로 태화동의 대부분과 유곡동을 관할하고 있다.

    유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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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 34년(1708)에는 무지동리(水落洞里)라 하던 단일 마을이었는데 영조 41년(1765)에는 길리(陸里)라 하는 마을이 생겼으나 무지동리는 없어졌다.
    순조 10년(1810) 길리(陸里)가 길촌리(吉村里)로 되었으며, 고종 31년(1894)에는 유곡(有谷), 평동(平洞), 길촌(吉村)으로 갈라져 있었던 상부면(上內面)에 속한 땅이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위 3개동에 범서면 운곡동(雲谷洞)의 일부를 합하여 유곡리(裕谷里)라 하였다. 1962년 6월 울산시 승격 이후 태화동 관할이 되었다.
    1985년 7월 울산시의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중‧남구로 나뉠 때 중구에 속했다.

    강순내

    • 유곡에서 을러내려 용금소(龍黔沼)로 들어가는 내이며 그 내의 하류쪽 서편에 동편으로 비탈진 곳에 있는 마을을 강순내라 한다. 약 100년 전 큰 홍수로 인해 유곡동의 수패골못 아래 새각단이란 마을에 큰물이 터져 그 곳에 살던 강순 처녀와 어머니가 물에 떠내려가서 죽었다. 이 시체를 평동(平洞)에 묻어주었는데 이 애처로운 무덤이 있는 곳을 처녀 강순의 시신이 발견된 내라 하여 강순내라 불렀다 한다.

    난곡(蘭谷)ㆍ난초골

    • 난곡(蘭谷)은 원래 범서면 운곡동(雲谷洞)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 멍정과 함께 상부면(上內面)으로 이속하여 태화리에 합하였다.
      헌종 14년(1848)에 세워 송시열, 김창집, 김제겸의 3현을 향사하던 난곡서원(蘭谷書院)이 있었으나 고종 때(1871) 없어졌다. 이곳에 난초가 많았다고 한다.
      난곡이라 함은 골안(谷內)을 뒤집어 부른 이름이다. 즉, 골안 - 골란 - 란곡으로 변한 것인데 안(內)과 란(蘭)이 서로 통전(通轉)하는 용례(用例)는 남해군의 난포(蘭浦)에서도 볼 수 있다.

    멀개(遠浦里)

    • 멀개라는 지명은 세종때와 예종때의 기록에 나타난다. 멀개(遠浦)는 그 뜻대로 읽으면 멀개가 되어 지금의 멍정(末亭)과는 음이 근사(近似)하고 그 위치를 고을 서쪽이라 하였으니 멍정으로 비정(比定)된다. 瑪瑠石이 남으로 마루개 머루개-멀개(遠浦)로 변전(變轉)하고 마루개는 다시 말개(末浦)-말정(末亭)으로 변한 것이 오늘의 멍정이라 사료된다.

    말정(末亭)ㆍ멍정

    • 정조 때에는 말정(末亭)과 상말(上末), 하말(下末)의 세 마을로 갈라졌다가 고종 31년(1894)에 말정의 단일마을이 되었다. 멍정이라 함은 말응정(末應亭)이라 하던 정자의 이름을 줄어서 멍정이 된 것이라 하기도 한다. 원래 범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에 4월에 난곡과 함께 부내면으로 들어와서 뒤에 울산읍 소속의 태화리에 속하였고, 1962년 6월 울산시 승격으로 태화동 관할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태화동불고기단지가 개발될 때 현재의 이름인 명정(明亭)으로 바뀌었다.

    반탕골(盤谷)ㆍ박티이골ㆍ반통골

    • 반탕골은 동강병원의 서편, 지금의 강변맨션과 삼익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고종 31년(1894) 이래 반곡(盤谷)이라 하던 독립된 마을이었는데 1914년 4월에 태화리에 합하였다. 이때에 마을 이름도 지금의 반곡으로 고쳐쓰게 되었다.
      반탕골의 유래는 골짜기의 생긴 모양이 마치 ‘반티이(함지)모양 같다’하여 생겼다. 이 부근 어느 문중 묘비에 반통곡(盤通谷)이라 기록도 보인다. 주변의 지세로 보아 태화사(太和寺)의 금당(金堂)이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보물 제441호인 태화사지 십이지상사리탑도 1960년대 초 반탕골에서 출토되었다.

    새에만리

    • 제일중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을 세에만리라 한다. 새에는 사이(間)의 방언, 아마 멍정과 난곡(蘭谷)의 사이라는 것으로 보이며 만리는 말랑(즉 마루)을 뜻하는 것이다.

    새터ㆍ신기(新基)

    • 반탕골의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흔히 '새터만디이'라 부르며 이는 새로된 마을이고 지대가 조금 높아 고개를 이루므로 이 이름을 가졌다. 이전에 태화동사무소가 있었는데, 현재 이곳은 신기경로당 터이다.

    태화(太和)

    • 신라 선덕여왕 5년(638)에 고승 자장(慈藏)이 당 나라로 건너가서 수도할 때의 일이었다. 산동반도의 태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다가 홀연히 신인(神人)을 만나 그의 계시를 받았다.
      태화지용(太和池龍)이었던 신인으로부터 황룡사(황룡사)의 용은 나의 맏아들로 범왕(범왕)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오.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풀어주면 외적이 해하지 못할 것이며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쪽에 한 절을 지어 함께 나의 복을 빌면 나도 또한 덕을 갚으리라. 하는 계시를 받은 자장은 선덕여황 12년(645)에 신라로 돌아 오면서 태화(太和)로 추정되는 사포(絲浦)에 머무르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태화지 신인의 복을 빌고 나아가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사찰을 지은 것이 태화사(太和寺)였다. 또 이 절에 딸린 남문루(南門樓)인 태화루(太和樓)도 서게 되니 이는 태화사와 태화루가 있었던 곳이어서 태화(太和)라고 한다. 이 때에 강 이름도 태화강(太和江)이라 하고 후세에 마을 이름까지 지어서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어온다.

    장승배기ㆍ장신백이

    • 태화동 신기마을 남쪽에 있었던 자연마을로써 20여 가호가 거주하였다. 1985년에 시행된 구획정리 때 원주민은 이주되고 마을 이름마저 사라졌다.

    화진(和津)

    • 태화진(太和津)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태화루와 태화종합시장이 있는 곳이다. 태화강에는 진도(津渡)가 세 곳 있었다. 태화진 이외에도 중진(中津), 내황진(內隍津)이 그것이다. 중진은 주진(注津)이라 하던 곳이며 각 나루마다 배 한 척씩 있었다. 태화진의 건너편은 월진(越津)이라 하였다.
      고종 31년(1894)이래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1914년 4월에 태화리에 합하였다. 이 마을 서쪽에 울산의 사직단이 있다. 이 사직단 서쪽은 반탕골(盤谷)이다.

    열녀강(烈女江)

    • 태화저수지에서 발원하여 명정천(옛 하마천)과 지금의 전원아파트 앞을 경유하여 태화들 중앙으로 흐르는 실계천을 말한다. 박종규의 처 여강이씨 열녀각 앞으로 흐른다고 하여 열녀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9년 사라호태풍 때 홍수로 정각은 유실되고 비(碑)만 남아 있는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 그 후 태화들 정비사업으로 열녀강은 없어지고 강 이름마저 사라졌다. 지금은 인공으로 실계천이 흐르고 있다.

    밤박골

    • 동강병원 뒤 태화산 북쪽 산록에 조성된 소규모 밤나무 단지가 있는 골짜기로, 이는 우정시장 대표인 박모 씨가 조성했다하여 밤박골이라 한다.

    부도골(浮屠谷)ㆍ부딧골

    • 관음사(觀音寺)가 있는 곳을 부디골이라 한다. 이는 부도(浮屠)가 있었던 골이었으므로 속칭 부디골이라 하였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1976년에 세운 관음사 부도곡 입구라는 표지석이 있다.

    대상들

    • 중구 태화동 ‘원안들’의 서쪽을 말한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돌빼기

    • 옛 다운목장으로 들어가는 도로 어귀의 남쪽 일대에 있는 들을 돌빼기라 하였는데 그 뜻은 알 수 없다.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고 북부순환도로가 나 옛 지형은 사라졌다.

    뚝뚝말리

    • 제일중학교 서북쪽에 있었던 옛 우유처리장 남쪽의 들을 뚝뚝말리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서서 옛 지형은 사라졌다.

    멍정들

    • 중구 태화동 명정마을 남쪽에 있었던 들인데 1980년대 토지개발공사의 태화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그 지형은 사라지고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지금의 명정초등학교가 있는 곳의 일대로 곧 명정천 서쪽이다.

    원안들

    • 멍정 앞의 관정(管井)이 묻어져 있는 들을 원안들이라 하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옛 도로 위는 주택이 들어서고 아래로는 체육공원으로 변하여 들판이 사라졌다.

    탑골메기

    • 제일중학교의 앞에 있는 들을 탑골매기라 한다. 탑(塔)이 있었던 골목이라는 뜻을 가진 것 같다. 옛날 언양 족으로 가는 골목길이 여기에 있었다 한다. 1980년대 초부터 이곳이 개발되어 지금의 구삼호교에 신기(새터)로 통하는 중간길, 즉 내오산로(새칭 ‘불고기단지길’)를 중심으로 그 위에는 주택지로, 아래로는 1999년 봄에 둔치 체육공원으로 변하였다.

    하말들

    • 중구 태화동에 있었다고 하는 태화사(太和寺) '앞들'이라 한다. 신라 경순왕이 말을 먹인 곳이라 하여 하말(下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하나 하말은 말정(末亭)의 아랫마을이란 뜻을 가졌다. 앞의 '멍정들'과 같은 들로 보인다.

    광대캐디이

    • 신기마을의 서남쪽 일대를 일컫는다. 이것은 아마 가면의 콧등과 같이 생긴 지형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내오산(內鰲山)

    • 오산 안쪽에 있는 산이다. 오산대밭(鰲山竹林)의 서쪽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삼산(三山)을 오산(鰲山)이라 한 대칭으로 이 산을 내오산이라 부른다. 거북이같이 생겼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의병장이었던 박홍춘에게 남산십이봉(南山十二峯)과 멍정에서 삼동까지의 30리에 달하는 태화강(太和江) 방전(鰱魚防箭)‧오산죽림 백여 경(頃), 멍정전결(末亭田結) 수십 두락(斗落 : 마지기)을 하사하였다 하는데 내오산도 마찬가지였다 한다. 여기에 그의 손자 박취문이 만년에 만회정을 지었으나 1880년대에 폐허가 되었다가 2011년 다시 복원되었다. 봄, 여름, 가을없이 여기에서 풍류를 즐겼다.

    부도골산(浮屠谷山)

    • 관음사가 있는 곳을 부도골이라 하는 한편, 이 부근의 산명도 부도골산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는 부도가 있었다고 한다.

    사직단(社稷壇) 터

    • 태화루 터 서쪽에 있는 사직단 터이다. 사직단은 원시신앙의 하나인 사직신을 제사지낸 단인데, 사(社)는 지신(地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뜻한다. 고대 생활은 농작물의 풍흉(豊凶)이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여 왔으므로 풍년을 정성껏 빌었으니, 전국 각처에 사직단을 모아 임금을 비롯하여 온 국민이 사직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울산의 사직단은 동국여지승람엔 고을의 서쪽에 있다 하고, 읍지에는 고을의 서쪽 5리 태화강 위쪽에 있다 하였으니, 곧 태화동 화진마을에 설치되었었다.

    오산대밭(鰲山竹林)

    • 내오산 아래에 있는 대밭이다. 일정시대 큰물이 져서 이 일대가 다 백사장으로 되어 있었을 때 일인(日人) 오까다(岡田)가 이를 헐값으로 매수하여 대를 심어 오늘날의 십리대밭으로 확장되었는데, 그보다 훨씬 옛날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1749)에도 대나무가 자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대밭은 백로‧갈까마귀‧해오라기 등의 서식지이다. 요즘은 야생동물 옷오리와 너구리도 가끔 보인다. 이곳 오산대밭 절벽바위에는 거북이가 새겨져 있다. 인간의 수명장수를 바라는 그림이다. 대밭 일대가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어 오산(鰲山)이라 하였으며 햇빛을 등에 지고 거북은 숨을 쉬고 있다.

    이씨 열녀각

    • 새티만디에 있다. 즉 학산서원 서쪽 언덕빼기이다. 이씨는 경주에 살았던 이기중의 딸로써 만회정을 지은 박취문의 증손인 박종규의 아내이다. 혼인한 지 반년 만에 지아비가 전염병으로 죽자 상을 치룬 후 그도 뒤를 따라 음독자살하였다. 고을사람들이 암행어사와 경상감영에 호소하여 조정에서 이 소문을 듣자 정려(旌閭)하였다. 남편에게는 호조좌랑, 부인에게는 정부인이란 직함을 내렸다. 이 정녀각은 원래 열녀강 뒤 명정천 옆에 있었는데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붕괴되어 훗날 현재의 자리인 학산서원 옆 언덕으로 옮겨졌다.

    학산서원(학산서원)

    • 중구 태화동 산 36-6번지(신기16길 15, 신기마을)에 향도유림과 성손들의 공의로 2005년 10월에 창건한 흥려(울산) 박씨 대종회의 서원이다. 동쪽은 동부아파트, 서쪽 언덕빼기는 선무원종일등공신 박홍춘의 묘소와 그 후손 종규의 처 열부 여강이씨의 정려각이 있고, 북쪽은 태화산 아래 약 300m거리로 관음사(부도골)가 위치하고 있다. 서남쪽에는 이문중의 재실 추원재가 남쪽은 옛 신기마을이 도시화되어 삼호교에서 시내로 통하는 태화로가 이어지고 있다.

    길촌(吉村)ㆍ육리(陸里)

    • 영조 41년(1765)의 기록에 길리(陸里)로 나타나는 마을이다. 육(陸)의 훈(訓)이 길(路)이므로 차훈(借訓)하여 길리로 읽는다. 길촌은 장등산(長嶝山)의 뜻을 따서 길(永, 長)의 뜻을 가진 마을이나 陸을 차자(借字)하였다.
      순조 10년(1810)에는 길리(陸里)를 길촌(吉村)이라 고쳐 쓰게 되었으며 吉도 역시 길(永, 長)의 음차(音借)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골(水落洞里)

    • 못안(池內)의 북쪽을 무지골(水落谷)이라 한다. 숙종 34년(1708)에는 무지동리(水落洞里)라 하여 3개 통(統)의 주거가 있었던 마을이었다.
      수(水)는 그 훈(訓)이 물이니 무만을 취하고 락(落)의 훈(訓)은 디이니 디와 지는 호전(互轉)하여 지가 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무지골은 물마을리란 뜻을 가졌다. 이곳은 예부터 물이 지린(기린) 곳이다. ‘지리다’란 넉넉하다, 흔하다는 뜻의 울산 방언이다.

    유골(有骨)ㆍ유곡(有谷‧裕谷)

    • 정조 10년(1786)의 기록에는 유골(有骨)이라 하던 마을이다. 이것이 고종 31년(1894)에는 유골[有谷]로, 다시 1914년에는 유곡(裕谷)으로 변하였다.
      골(骨)은 옛 고구려 땅이었던 지명에 붙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골[谷]과 마찬가지이다. 고구려 때는 고을[邑]을 골[忽] 또는 골(骨)로 표기하였던 것이다. 유(有)는 얻을 유이니 유골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마을터를 얻을 곳이라는 뜻을 가졌을 것이며 이것이 오늘의 유곡으로 변한 것이다.

    절태골ㆍ절터골

    • 수운 최제우 유허지의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유곡동 623번지에서 655번지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절터골이라 한다.

    평동(平洞)

    • 평동(平洞)은 고종 31년(1894) 이래 줄곧 평동이라 하여왔다. 무릇 평(平)은 들[野]을 뜻하는 것이다. 평동의 경우는 평지로 된 들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평동의 본마을은 맨 서단의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었으므로 이 지형을 본다면 평지라 할 수 없다. 이 마을에는 천석을 하였던 조씨(曺氏)가 살았으므로 편안한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독적골ㆍ독점골

    • 옛 다운목장에서 남동으로 뻗은 골자기를 독적골이라 한다. 이 독적골을 두고 다운동쪽에서는 도계골(陶溪谷)이라 하며 또 도적들이 숨어 살았다하여 도적골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같이 이어진 골짜기를 태화나 유곡에서는 독적골이라 부른다. 생각하건데 독이나 항아리를 만들었던 독점골에서 유래된 것이라 보여진다. 점(店)은 옹기점이나 사기점, 쇠부리점 따위의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못을 정조 10년(1786)본 울산읍지는 유골제(有骨堤)라 이름 하여 길이 460자 넓이 242자라 하였으며 하말들과 원안들‧대상들에 관개(灌漑)하였다.

    불선골ㆍ불썬골

    • 절터의 안쪽에 불썬방우가 있는 골짜기인데, 이 바위 밑에 향촉을 밝혀놓고 공을 들이던 곳이었으므로 불선골이라 한다. 서다는 켜다의 방언이다.

    수패골ㆍ숲(林)엣골

    • 유곡과 새각탄의 사이에 즉, 길촌마을 동남쪽에 있는 있는 골짜짜기이다. 숲[林]에 골이란 것이며 여기에는 수패골못이 있다.

    영장골

    • 멍정에서 북으로 들어오면 서쪽 골짜인데 독적골에 이어지는 곳이다. 옛날 이곳이 채봉터(假葬-)였으므로 영장골이라 한다.

    예수바우골ㆍ예수방웃골

    • 절터골에서 동북으로 뻗은 골짜기이며 여우가 바위 위에 자주 나타나므로 그렇게 부른다 한다. 여기의 예수는 여우의 울산지방 방언이다.
      동학(東學)을 창도하였던 최제우가 1854년에 이곳에 와서 수도를 하다가 이듬해인 을묘년에 어떤 선사로부터 천서(天書)를 받고 크게 깨친 곳이다. 그 천서를 을묘천서(乙卯天書)라 하며 예수바우골[狐岩谷]은 동학의 성지(聖地)이다. 현재 이곳은 1997년 천도교에서 세운 천도교 교조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와 1999년에 세운 비각이 있다.

    원유곡(元裕谷)

    • 원래의 유곡이란 뜻으로 원유곡이라 한다. 함월고등학교 서편에 있었는데 2011년 이후 우정혁신도시의 조성으로 마을과 그 앞의 야산을 모두 허물고 주택 및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귀신고래바위

    • 길촌마을 초입에 귀신고래바위가 있다. 도로에 붙어있는 이 바위는 높이 40cm, 길이 120cm 크기로 귀신고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귀신고래가 머리를 물 밖으로 내민 모습과 닮았다. 마을사람들은 범바우라고 부르는 이 바위는 마을의 수호신이다.

    사당 만디이

    • 절터골의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여기에 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서당만디이라 한다. 만디이는 말랑이, 즉 마루의 방언이다.

    섯갓비알

    • 절터골의 서쪽에 있는 산을 섯갓비알이라 하는데 섯(西)갓비알인 것 같다. 갓은 산지(山地), 비알은 비탈[斜地]의 방언이다. 섶갓비알로 볼 수도 있다. 섶은 섶나무의 준말이다.

    함박등(含朴嶝)

    • 예수바우골의 안에 있는 산을 함박등이라 한다. 하늘[天]의 원어 한을 의미하는 뜻을 담은 밝은 산이다.

    못안(池內)

    • 태화초등학교가 있는 곳은 옛 못터였다. 이 못의 물로 옥교동까지 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못터의 안쪽에 있으므로 못안이라 부른다.

    녹사리

    • 녹(錄) 사래가 변하여 녹사리라 한다. 사래는 논밭의 이랑의 옛말이다. 평동의 북쪽에 있는 밭인데 묘지기나 마름(舍音)의 보수로 부쳐 먹는 밭이다.

    유곡고분유지

    • 절터골을 중심하여 독적골의 어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분이 있었으나 다 개간할 때 없어졌다. 토기를 비롯하여 귀고리(耳環), 활촉, 칼(刀)등의 출토도 있었다. 이 중 칼은 그 길이가 6, 70cm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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