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외동
남외동은 숙종 34년(1708)에 영남문외리라 하였던 마을이다. 정조 때 곽남이라 하다가 고종 31년(1894)에는 곽남과 남외로 갈라지고 1911년에는 남외동의 단일 마을이 되었으며 1914년에 남외동에 서동의 일부를 합하여 남외리라 하였다. 지금은 행정상으로 병영동을 형성하고 있다. 남외라 함은 병영성의 남문 밖이라는 말이며 흔히 남밖이라 한다.
동남외 서남외
- 남밖을 동서로 나누어서 동남외와 서남외라 부르게 되었다.
곽남
- 병영성곽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말이 되며 남밖의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어 있다.
베롬산
- 남외의 동쪽에 있는 한 구릉을 베롬산이라 하는데 이는 동쪽으로 높고 급한 벼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벼랑산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베롬산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또 벼름빡 같다하여 베롬산이라 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여기에는 옛날에 망월루와 사정이 있었다고 전한다. 사정은 병정들이 활쏘던 곳이었으며 여기를 사정골이라 하였다. 또 베롬산에는 3·1사가 있으며 이는 서동에 있던 것을 옮겨 세웠다.
정지말들
- 울산 공설운동장이 있는 일대의 넓은 들판을 정지말이라 한다. 이는 아마 산전샘의 끝이라하여 정지말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산전샘에서 끊임없이 솟는 물은 이 정지말로 흘러가서 관개수 하였다.
가내골
- 곽남과 반구·약사의 경개를 가내골이라 하며 여기를 흘러 공설운동장 서쪽으로 빠져 서원 뒤에서 동천에 합류하는 내를 가내골도랑이라 한다. 생각하건데 가내라 하는 것은 갓내로써 내상의 갓으로 흐르는 내이므로 가내라 하고 이 내의 주변을 가내골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아진다.
삼일사
- 남외동 549~1 번지인 베롬산에 있다. 병영에서 일어났던 기미년의 3·1운동에서 순국한 독립투사와 이 운동에 같이 참여하였다가 작고한 기미계원들을 봉안한 사당이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지방에도 파급되어 병영에서도 서울에 유학했던 한 명조·이 영호로부터 전해듣자 때를 놓치지 않고 청년회 간부였던 양석룡·이현우·이종욱·이문조·박영하·김장수·이종근 등은 거사를 위한 모의를 거듭한 끝에 4월 5일과 6일 양일에 걸쳐 성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 일신학교 학생과 성내 전 주민들이 호응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나 총과 검으로 무장한 일본 수비대와 충돌하여 그 자리에서 엄 준·문성초·추사문·김응룡의 네 사람이 순사하고 송근찬·김규식·김두갑 등 많은 인사들이 중경상을 입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해산하고 말았다. 또 이 운동으로 사상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일경에 잡혀 옥고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 일로 형을 받은 사람은 이현우·이종욱·이종근·이문조·이종필·최현구·황정달·김장수·양석룡·이종룡·박규환·김재수·권석운·이홍준·최금석·서무출·최현표·백봉근·최원득·김송근·이근복·윤학이 등이었다. 실형을 받았던 동지들이 형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들은 기미계를 조직하고 순국한 동지의 외로운 넋을 달래기 위하여 매년 4월 6일에 제사를 받들어 오다가 1955년 병영의 부속건물이었던 영모각을 개수하여 삼일사를 세우고 이들을 안치하는 한편, 삼일사 봉제회를 만들어 길이 그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있다.
천주교 순교자 형장
- 남외동 568~5 번지이다. 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잡아 처형할 때의 일이었다. 상북면의 간월산에는 공주 사람 김누까(김종륜)·김해 사람 허 야고버(허인백)와 이 베드루(이양등)의 세 천주교 신도들이 난을 피하여 숨어 있었다. 그들은 산에서 목기 등을 만들어 행상을 하며 살았으나 불행하게도 고종 8년(1871)에 경주의 포교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경주에서 한달동안의 옥살이를 하다가 그들은 울산의 좌병영으로 이송되어 국문 끝에 세 사람이 다 사형의 선고를 받고 음력 7월 28일에 남외의 장대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는 윤선응이었으며 그 형장에는 1979에 세운 순교자 현양비가 우뚝 솟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