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동
우정동은 예종 1년(1469)에 강장리, 숙종 34년에 우암리와 강정리, 장생리로 갈라져 있었다. 영조 41년(1765)에는 우암리, 강정리, 장생리, 정조24년간에는 창성리, 우암리, 강정리, 순조 10년(1810)에는 우암리와 강정리, 창성리, 헌종15년(1849)에는 금암리, 우암리, 강정리, 창성리, 고종31년(1894)에는 창성동, 우암동, 강정동으로 갈라져 있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위 3개동에 상안동의 일부를 합하여 우정동이라 하였다. 우정동이라 함은 우암동의 우(牛)와 강정동의 정(亭)을 서로 따서 된 이름이다.
강장리
- 면제(面制)가 시행되기 전인 예종 1년(1469)의 경상도 속찬지리지에는 강장리라 하여 태화진까지를 관할하였다. 장(將)의 뜻이 크다는 것도 되니 큰 강가마을이란 뜻이 될 것이다. 강장리가 변해서 뒤에는 강정이 되었다.
장승골
- 숙종 34년(1708)의 기록에는 장생동리라 하였던 마을이며 선경공장의 서편 일대를 말함이다. 이정표인 장승이 있었기 때문에 장승골이라 부른다. 정조년간의 기록에는 창성리라고도 하였는데 고종 때 이래 창성으로 고정되었으며 그 근원은 본시 장승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에 드는 장생포동의 경우를 보더라도 장(長)과 창(昌)은 서로 출입관계에 있었던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소바우
- 숙종 34년(1708)에 우암리라 하였다. 소를 닮은 바위가 있었다하여 소바우라 부른다고 전해오나 솟바우에서 유래되었을 지도 모른다. 현종 15년(1849)에 마을을 가르면서 쇠바우와 우암이라 하였으나 모두 소바우라 함과 다를 바가 없다. 금암(金岩)은 소[牛]의 바우가 준 쇠바우의 훈차(訓借)한 것이며 이러한 용례는 고지명에 많이 볼 수 있다.
성황당
- 신계변천신을 모신 울산의 서낭당이다. 마을마다 그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서낭당이 있는 반면 고을은 고을의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이 따로이 있다. 큰 회화나무가 있는 서낭당은 울산부의 서낭당이며 서쪽에 있는 것은 소바우의 서낭당이었다.
송도효자비
- 송도는 이조 세종때의 효자이다. 병중에 있었던 부모에게 10년여동안 정성껏 약을 올렸으며 부모가 돌아가자 손수 흙과 돌을 져다 날라 묘를 지었고 사당을 지어 새벽마다 향을 피우며 새로운 음식이 나면 먼저 올렸다. 이러한 일을 나라에서 알게되자 정려하였다.
강정
- 소바우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태화강가에 정자가 있었으므로 이로 인해 강정이라 하였다. 태화강의 제방이 없었을 때를 연상하면 강정의 참뜻을 알게 된다.
까치골
- 선경아파트의 서북편을 까치골이라 한다. 까치골에는 풍년도가리가 있었다. 도가리라 함은 논의 한구역 즉 논베미를 말하는 것이다.
불선바우
- 교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으며 또한 성안과도 접경한 곳에 있다. 암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인데 이 바위에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 이를 불선바위라 부른다. 바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토속신앙을 아직도 볼 수 있다. 또한 향교에 이르기까지의 골짜기도 역시 불선바우라 한다.
무지골
- 숙종 34년에는 무지동리라 하던 마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