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동
학성동은 영조 41년(1765)년에 증성리라 하였던 마을이다. 1849년경에는 학동리라 하였다가 고종 31년(1894)에는 학남동과 학서동으로 갈라졌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 두 마을에 노하동과하부면 서부동의 일부를 합하여 학성동이라 하였다.
학성동촌명 변천일 변천일동
- 영조41년 (1765) : 증성리
- 1849∼1870 : 학동리
- 고종31년 (1894) : 학남동, 학서동
- 1911년 : 학남동, 학서동
- 1914년 : 학성동
갈화(葛花)
- 학성공원의 역사적 명칭 중 하나로 갈화(葛花)가 있다. 갈화라는 이름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며, "굴불인 듯 하나 지금 울주"라는 문구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갈화는 굴화 지방의 굴아화로 볼 수도 있지만, 굴아화의 영역 안에 있었던 학성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울산 지방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갈화에서 "갈"은 "갓"의 음역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화"는 고대어에서 국읍(도시)이나 원야(들판)를 의미하는 단어로, 다양한 한자로 대체될 수 있다. "발(發)", "팔(八)", "불(弗)", "비(沸)", "불(佛)", "부(不)", "벌(伐)" 등의 음과 의미가 유사하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볼 때, 갈화라는 이름은 울산 지역의 중심부로서 신성한 성읍을 뜻하는 개지변(開之邊) 또는 계변성(界邊城)과 같은 맥락을 가진 명칭이다.
개지변(開之邊)
-
개지변은 신라 시대에 학성 지방의 성읍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서 개지변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학성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울산 지역을 의미한다. "개"는 신라 시대 지명에서 주로 "그·거"로 발음되며, 신(神)이나 왕(王)을 상징하는 "금·검"과 상반되는 음으로 나타난다. "개지변"의 "지"는 산이나 고원을 뜻하는 고대어 "티"와 유사하며, "변"은 변방을 나타내는 말이다.
결국 개지변은 "변방에 위치한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군사적 방어 지역이 아니라, 신령의 기운이 깃든 변방의 성읍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특히, 개지변을 "개지극당"이라는 부대가 지키는 변방으로 해석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계변성(界邊城)과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
계변성(界邊城)
- 계변성은 개지변을 한식(韓式)으로 고친 명칭으로 볼 수 있다. 고려사 지리와 세종실록 지리에 처음 등장하며, "계"는 "개지변"의 "개"와 동일하게 신(神)을 뜻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처럼 "개"와 "계"가 통용되는 사례는 신령스러움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되었다.
계변성의 "변"은 변방을 뜻하고, "성"은 성채를 의미하지만, 광의로는 고을이나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성채가 곧 하나의 고을 단위였기에, 계변성은 "신성한 갓고을"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개지변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신두산과 학성
-
학성공원의 전신인 신두산은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왔다. 신두산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신"은 신령스러운 존재를 의미하며,
"두"는 머리 또는 정상을 뜻한다.
이 두 음절은 모두 신라 시대와 고대 한국어에서 신성함과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특히 "마리(머리)"와 같은 어원을 가지며, 이는 고구려의 관직인 "막지리"와 신라의 왕칭 "마립간"과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신두산은 또한 "마리뫼"로 불리며, 신령스러운 정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곳에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주관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신학성(神鶴城) 또는 학성(鶴城)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고려 성종 때는 울산의 별칭으로 학성이 사용되었다.
또한 신두산은 붓처럼 솟아 있는 모습으로 인해 필봉(筆峰)이라 불리기도 하며, 산의 형태가 시루와 닮았다고 하여 시루성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시루성
- 계지변이나 계변성에 성채가 있었다면 신두산에 있었을 것이다. 신라때의 성채란 것은 조선조의 읍성과 같은 것은 볼 수 없고 험요한 산에 성을 쌓은 산성이었다. 학성지방에서는 신두산을 두고 달리 쌓을 만한 요지를 찾을 수 없는것이면 다른 곳에는 성다운 흔적을 남긴 곳이 없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와서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루를 엎은 것 같다하여 시루성이라 불렀다. 울산지방에 시루를 엎은 것 같다는 시루성은 전하동의 방어진산성과 상북면 등억리의 과부성이 있으며 신불산의 단조성은 단지성이라 한다. 영조 때 증성리하 하였던 지명도 이 시루성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도산성
- 이 도산성은 정유재란 때의 격전지이다. 왜군들이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서 이 왜성을 쌓았다. 선조 30년 12월 23일부터 31년 1월 4일까지의 1차 전투와 31년 9월의 2차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맹공을 퍼부어 성밖의 적진은 이를 격파 하였으나 계속된 포위 공격에도 이를 함락 시키지는 못한 한스러운 왜성이다. 남쪽은 태화강에 닿았고 들 가운데 섬처럼 고립한 성이었으므로 도산성이라 한 것이다.
사적 9호
도산선소
- 임진왜란이 끝이 나자 도산에 전선창인 선소를 두어 배를 만들어 왔으나 토사의 중적으로 뱃길이 막힘으로 효종 7년(1656) 에이를 개운포로 옮겨 갔다.
나발등
- 학성공원의 동쪽을 나발등이라 한다. 이는 도산의 산세가 동쪽으로 나팔과 같이 뻗어내렸다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다.
역전
- 울산역이 되고부터 그 북쪽 일대를 역전이라 부른다.
학성산
- 학성공원의 서북에 있는 산을 학성산이라 한다. 단지 학성에 있는 산이라 하여 그렇게 부를 따름이다.
푸지샘
- 학남에 있었던 우물인데 수량이 풍부하고 물맛이 좋아 이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물이 넉넉하고 푸지다하여 푸지새미라 하였다.
학남
- 학성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학남이라 부른다.
학서
- 학성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이를 학서라 한다.